지난 학기 기호학 수업을 함께 수강하는 학과 동기들 그리고 교수님과 함께
자카르타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Kota Tua (옛도시)를 견학하게 되었다.
꼬따 뚜아는 자카르타 시내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네덜란드 식민 지배를 받던 시기에 가장 번성했던 지역으로
현재도 그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자카르타 꼬따 역을 중심으로 주변에 옛시청과 도자기 박물관
파타힐라 광장과 바타비아 카페 등 역사적 명소들이 몰려있다.
(시간을 조금 길게 내어 한 번 방문으로 다 둘러보는 것을 권함)
자카르타 꼬따역(Stasiun Jakartakota)
1930년대 네덜란드 양식으로 건축된 자카르타 꼬따역.
개인적으로는 2년 전 학생들과 반둥여행을 떠나기 위해 모였던 곳.
지금은 시내 중심의 모나스 옆에 있는 Gambir감비르 역이 훨씬 붐비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일요일 아침 8시, 네덜란드어 교수님과 대학원 동기들이 모여
자카르타 꼬따 견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어와 식민지배 시절의 역사를 꿰뚫고 계신 교수님과 함께하니
훨씬 자세한 설명도 들으면서 옛 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었다.
자카르타 꼬따 역을 나와 밖으로 30여 미터를 걸어 나와 마주하게 된
네덜란드 양식으로 지어진 400년 된 시청(현재는 역사 박물관으로 운영됨)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옛 조선 총독부와 같은 기능을 했던 곳으로
민족의 아픈 역사와 상처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 나라는 1995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하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와장창 철거를 해 버렸는데,
인도네시아는 잘 보존해서 역사의 배움터로 활용하고 있었다.
(하긴 350년의 식민지배 흔적을 다 지우려면 철거해야 할 건축물이 끝도 없을 듯)
옛 시청이면서 지하에는 무시무시한 감옥이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네덜란드 총독의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던 이곳은
일본군 점령 시기에는 일본군이 주둔했고,
1974년에 이르러 자카르타 주지사 Ali Sudikan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박물관 개관을 기념하는 현판
시청 안에는 이렇게 다양한 공간들이 나뉘어 있었다.
총독의 집무실에 놓인 책장
우리나라에서도 보루네오 가구가 유명하듯
인도네시아의 깔리만딴 섬(보루네오 섬)의 원목이
질 좋고 견고하며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바타비아를 지배하던 그 시절 네덜란드 총독의 안목도 뛰어났던 것 같다.
화려하면서도 튼튼하고 장엄한 규모의 책장들이 집무실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나를 경악케 한 지하 감옥
시청의 1,2층이 총독의 집무실과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아름다운 뜰에서 각종 연회와 결혼식이 열리는 데 반해,
그 지하에는 식민 정부 시절의 범죄자들, 독립운동가들, 심지어 지방의 왕족까지
이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더러운 물이 차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도 비가 많이 내리는 자카르타 저지대의 특성상
감옥에 물이 차올라 죄수들이 익사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고
아 ㅠㅠ
지하 감옥의 창살
감옥 내부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안에 있는 포탄같은 것들이 뭔가 했더니
죄수들의 손발에 매다는 쇠뭉치라고 ㅠㅠ
일어서거나 누울수도 없는 이 좁은 감옥에
한 번에 수십명이 수감되었고 비위생적인 시설 탓에
투옥 중에 전염병으로 많은 죄수들이 죽어나가거나
혹은 풀려난다 해도 못 걷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교수님과 친구들로부터 들으면서
나 역시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일제로부터 고통받았던 비슷한 일들을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타민족에게 난폭한 지배를 받은 역사적 아픔이 있는 두 나라 국민이 만나
서로의 상처를 이해해 보면서 뭔가 끈끈한 공감이 이뤄졌다.
시청 2층의 집무실 창밖으로 바라본 파타힐라 광장의 모습
400여 년 전, 고문이나 공개처형이 행해지던 그 아픔의 장소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자유롭고 활기찬 모습으로 같은 장소에 서 있다.
이 시끌벅적 활기찬 파타힐라 광장에는
많은 관광객과 상인들이 한데 어울려 북적북적 한바탕 소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파타힐라 광장 건너편으로 보이는 왼쪽의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바타비아 카페
요 바타비아 카페는 19세기 말에 증축되었는데
바타비아 시절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살롱 분위기의 카페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수카르노 대통령 등 유명인이 많이 찾은 곳으로도 유명하고
자카르타를 찾은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번 쯤 가볼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 자카르타의 옛이름 바타비아Batavia가 궁금한가?
자카르타는 현재 다양한 종족이 모여 살고 있지만
원래 이 곳의 주인은 순다Sunda족과 Betawi브따위 족이다.
힌두 왕국 시절에 순다 끌라빠라고 불리던 명칭이
이후 이슬람 왕국이 들어서자 자야카르타(Jayakarta-위대한 승리)로 변경되었는데,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이 자카르타 지역을 침략하면서 브따위 족을 처음 마주하고
브따위의 발음을 네덜란드 식으로 한 것이 바로 바타비아라고...
독립을 맞이한 후에 자카르타(Djakarta)로 불리다가 표기법이 바뀌면서
오늘날의 Jakarta가 된 것이다.
옛 시청건물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도자기 & 예술품 박물관(Museum Seni Rupa dan Kramik)
주소 : Jalan Pos Kota No. 2 Jakarta Barat
Telepon: 021.6907062
Telepon: 021.6907062
개장 시간
화요일 ~ 목요일: 09.00 – 15.00금요일 : 09.00 – 14.30
토요일 : 09.00 – 12.30
일요일 : 09.00 – 15.00
매주 월요일, 국경일은 휴무
1870년에 완공된 이 도자기&예술품 박물관은
16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도자기와 예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시대의 도자기 예술품 뿐만이 아니라
베트남, 일본, 유럽 등지에서 온 다양한 도자기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개관의 역사와 의의를 설명해 주고 계시는 교수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기억에 남았던 익살스런 무늬의 발리 도자기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총독들 초상화
도자기 박물관이니만큼 도자기를 빚는 수동 물레
오~~~ 마~~~아이 러~~~브, 마이 다~~알리~잉
난파선에서 건져올린 도자기들
섬나라 인도네시아는 예로부터 국내, 국외의 해상교역이 발달했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침몰된 배들의 수가 셀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자카르타 근교는 물론 발리나 다른 지역의 여러 다이빙 포인트에는
난파섬 탐험을 할 수 있다.
이런 전시품들을 보니, 나도 보물을 발굴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ㅎㅎ
산호초인지 돌인지 모를 구슬로 꿰어 만든 오래된 장신구
요즘 유행하는 판도라 팔찌랑 비슷한 모티프?? ㅎㅎ
창의적인 디자인의 도자기들이 많아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박물관 뜰에는 현대미술 조형작품들도 서 있고
입구에는 귀부인들이 타고 다녔을 마차도 전시되어 있다.
꼬따 역, 시청, 파타힐라 광장과 바타비아 카페, 도자기 박물관을
모두 구경했으면 꼬따 뚜아 투어는 거의 끝
만약 좀 더 시간이 된다면 순다 끌라빠 항구쪽으로 발길을 돌려
오래된 다리도 구경하고
항구 주변에 아직 남아 있는 수탈품 저장 창고도 빙 둘러 볼 수 있다.
Jembatan Kota Intan
자카르타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도개교의 모습
4.4미터의 폭과 30미터 길이의 붉은 색 도개교인
Jembatan Kota Intan은 1628년 건설되었다.
현재는 다리의 기능은 하지 않고 관광 상품이 되었지만
부지런히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하며 다리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
그 옛날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지방에서
가난하고 순박한 농민들이 가꾸던
향신료와 식량, 각종 물자, 혹은 그 농민들 자신이 노예가 되어
이 다리 밑을 지나 순다 끌라빠 항을 거쳐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 옛날 우리의 부산항과 목포항이 그랬던 것처럼...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한 명의 외국인으로서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풍요로움만을 누리고 살고 있는 나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준 꼬따 뚜아 견학이었다.
여유로운 주말 아침,
오늘날 자카르타를 있게 해 준
바타비아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Kota tua로 향해보자.